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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의 살림집> _ 노익상

북카페청시 2010. 2. 8. 01:54

 

 

 

<가난한 이의 살림집> _ 노익상

 

차고 거친 바닥 먹먹한 하늘
이제 잊혀 가는 삶의 공간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제 탯자리를 떠나 갯가, 산간으로 들어간 이들의 외딴집.
도회로 들어와 파편화된 삶을 꾸려야 했던 이들.
다큐멘터리 사진가 노익상이 10여 년에 걸쳐
지난한 이동과 이주를 거듭했던 이들과 교감하며 기록한 작업!


 

청어람미디어의 신간 [가난한 이의 살림집]은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칼럼니스트인 노익상이 10여 년에 걸친 취재 기간과 5년의 집필 과정을 거쳐 엮어낸 사진에세이다. '근대 이후 서민들의 살림집 이야기’라는 부제를 통해 알 수 있듯, 1970, 80년대부터 현재까지 가난한 사람들이 짓고 살았던 민간 가옥을 120여 장의 사진과 함께 11가지의 주거형태 에피소드로 기록한 로드 다큐멘터리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취재를 하던 중, 가난하고 헐벗었던 이들, 즉 우리의 부모들 혹은 두 세대 위의 가난한 이들이 짓고 살았던 살림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일반적으로, 한옥을 비롯한 전통건축과 대규모 건설 플랜트를 포함한 현대건축에는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갖는다. 전통건축은 궁중건축과 반가 및 종중의 고택, 그리고 정원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고 폭넓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현대건축도 새로운 근대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초고층 초대형 건축물을 시공하고 소개하는 일에 많은 학자와 지식인의 노력이 있었다. 문학이나 예술, 심지어 연구성과물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와 매체에서 전통가옥의 특징과 장점을 경쟁적으로 다루고, 현대건축물의 빼어난 조형성과 편리성에 주목했지만,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살림집’은 점점 잊혀 가고 소외되었다. 이러한 아쉬움과 서운함, 더 나아가 문제의식을 정면으로 내세우며 저자 노익상은 이 책의 집필을 결심했다. 또한 저자는 '누구나 돌려 읽으며 무릎을 치고 감동'할 글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소외된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와 그네들의 삶에 공감하고, 그들과 함께 교감한 저자의 끈기와 정성은, 근대 이후 한국 사회의 이면을 생생하고 솔직하게 기록하고 표현한 의미 있는 작업이다. 동시에,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는 적극적인 시선이 돋보이는 성과물이다. 불편하지만 역사의 한 부분으로 엄연히 남아 있는 사실, 하지만 따뜻한 시선을 쉽게 보내지 않았던 현실, 눈여겨보지 않았고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알아야만 하는 진실을 밀착 취재했다.

'가난한 이의 사진가’ 노익상이 10년에 걸쳐 엮은 다큐멘터리 역작
다큐멘터리 사진가 노익상은 글과 사진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꾼이다. 스스로 '내 이야기는 길바닥에서 건져 올린 날것'이라고 말하는 '촌(村)사진가’이자 '가난한 이의 사진가’다. 그는 전국에 가본 곳을 말하기보다는 안 가본 곳을 말하는 게 더 빠르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가볼 곳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 책에는 각 지방에 대한 저자의 풍부한 경험과, 향토색 짙은 사투리 및 우리말들이 많이 표현되어 그네들의 삶을 더욱 생동감 있게 전해주고 있다. 우리에게 잊혀 가는 살림집과 마찬가지로, 잊혀 가는 말과 풍경들을 글과 사진으로 담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함께한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직접 보여주고, 우리가 현재 이 사회에서 겪는 갈등과 아픔이 어디에서 시작했는가를 찾아보면서 '응어리 있는 아픔들을 풀어가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필름카메라로 직접 찍은 120여 장의 사진들도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가질 것이다.

왜 '근대 이후 서민들의 살림집 이야기’인가?
이 책은 단순히 전국을 돌며, 잊혀 가는 '가난한 이들의 주거지’를 사진으로 찍고 취재한 기록물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가난하고 헐벗었던 이들이 버려지거나 최소한의 재료를 구해 지은 집들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고, '이들의 안타까웠던 현실을 함께 공감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하며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이동’과 '이주’라는 말이 본래는 낯선 것이었다는 사실을, 조선조를 관통하며 경제 사회 문화를 바탕에서부터 이끌었던 벼농사를 언급하며 저자는 설명한다. 대표적인 노동집약적 형태이며 마을 단위의 규율과 역할을 체계적으로 강조한 우리의 문화는 유교적 이념이 뒷받침 되었고, 수백 년 동안 조선조를 지탱해왔다. 이 책은 국가와 전통 촌락의 유기적 카르텔이었던 근간을 헤칠 수 있는 자유로운 이동과 이주가 엄격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음을 설명하며, 그 질서에 따르지 못하거나 대든 이들이 당한 추방과 죽음에 주목한다. 그래서 외딴 형태나 길가 정착과 같은 주거 이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근대화를 거치고 전통 봉건 질서가 무너지며 자유로운 이주가 시작되었고, 산간이나 갯가 그리고 섬으로 이주하여 극한의 처지에서도 끈기 있게 살아남은 이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가난한 이들이 '이주’를 통해 겪어왔던 내밀한 사정과 아픔,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시대의 그늘에 가리고 묻히며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그들의 삶과 살림집에 대한 새로운 조명은, 그 시도만으로도 이 책이 시사하는 바와 의의를 드러낸다.

잊혀 가는 삶의 공간,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기쁨과 눈물의 기록들
'이주’라는 말은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개념이다. 그래서 [가난한 이의 살림집]에서는 이주와 관련된 총 11가지 형태의 살림집을 소개하며 그들이 느낀 기쁨과 흘린 눈물을 함께하고 있다.
길가에 들어선 가난한 집의 초기 정착 형태 [외주물집], 제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던 이들의 [외딴집], 화전민을 집단 이주시킨 [독가촌], 대민 감시 기능을 하면서도 배워서 가난을 이기기 위한 [분교], 도시로 들어와 쫓기며 고단한 살림을 꾸려야 했던 [막살이집], 떠남(이주)으로서 이겨보려는 [간이역], 도회나 광산촌으로 떠나기 위해 서성대던 [차부집], 그리고 그들이 도시 일용자로 몸을 뉘던 [여인숙], 군사정권의 강력한 실천 의지였던 새마을 운동과 공업화 정책을 설명하는 무렵 등장한 [미관주택], 가난한 이들의 마지막 이동 경로이자 모순되고 파편화된 공동체성이 아파트를 통해 확산되어 가는 모습인 [시민아파트]와 [문화 주택].
가난한 이들이 처음 외딴집으로 나와 차부와 간이역을 거쳐 도회나 신흥 공업지역으로 이동하고 오늘날 어떤 주거 형태로 정착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과정과 현재 살고 있는 모습을 알아보는 일은 개인의 관심을 넘어 우리가 함께 짚어보고, 앞으로도 더 연구하고 찾아내야 할 과제로 남는다고 저자는 밝힌다. 근대 이후 서민들이 품었던 희망이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음이 현실로 나타나는 현재, 이 책은 완결된 기록이 아니라 여전히 계속되어야 할 작업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기차를 타고 누구나 여행을 하지만, 본디 우리는 '길'이라는 물리적 이동 통로에 매우 인색했다. 어쩔 수 없이 낼 수밖에 없던 행정 교통로를 빼면 길 문화란 것 자체가 낯선 나라였다. 목축과 밀농사가 중심이 되고 일찍이 길을 닦아 자유로운 이동에 관심을 두었던 서구에 견줄 때 그 폐쇄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끊임없는 이주와 섞임의 역사로 저 서구사회가 바탕을 이뤘다면, 우리나라는 이동과 이주보다는 정착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절대시 했다. 그 탓에 이주문화가 자연스러운 서구에 대면, 외주물집(노변가옥)이 발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이는 길가 가까이 집 짓는 일 따위를 천한 살림으로 보고 꺼렸던 탓도 있지만, 국가 통치에 반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외주물집 중에서/ pp.16~17)

근대 이전만 해도, 향리라는 전통적 주류에서 떨어져 나와 사는 것은 곧 죽음을 일컬었고 실제 죽음과 같은 말로 쓰였던 현실에 대보면 이런 외딴 형태의 살림은 매우 위험하고 외로웠으며 고독한 것이었다. 그래서 길을 나선 유이민들이 이런 혹독함을 피하고자 그래도 사람이 있고 마을이 있는 간선로나 진입로변에 외주물집 형태로나마 살림을 이으려고 발버둥 쳤던 것이다.
(외딴집 중에서/ p.48)

조선사회를 넘어 산업사회 초기에 이르기까지 마을은 절대적인 국가의 기초 단위였다. 이동이 자유로운 지금과 달리 당시 마을 단위에선 특정 세시기에만 이웃 마을과 교류가 이뤄지는 지극히 폐쇄적인 사회였다. 사람이 태어나면 반가가 아닌 이상 평생 그 마을에서만 살다가 죽는 것이 덕목이었고 규약이었다. 설령 마을을 벗어난다 해도 험한 지리적 조건으로 얼마 못 가 죽음을 맞거나 다른 마을로 간다 해도 받아줄 리 만무했던 것이 당시 사회 현실이었고 불문율이었다. 이는 신분질서에서 오는 지방 토호의 이익과 국가 지배세력의 천인을 포함한 양인 통치술로 보통 요긴한 게 아니었다.
(독가촌 중에서/ pp.82~84)

교사는 관사 생활을 했는데, 이 점이 바로 도회 학교가 흉내 낼 수 없는 긍정적인 면을 낳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준 듯했다. 특히 산간 마을 사람들 처지를 지식인인 교사가 꼼꼼히 헤아릴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었던 점은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었다. 결코 소홀히 넘길 수 없을 만큼 효과가 커 보였던 것이다. 조손 가정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살필 때, 묘약처럼 위력을 발휘하는 모습들을 보면서였다. 이는 밤낮 할 것 없이 보고 겪을 수밖에 없었던 다채로운 환경이, 어느덧 산간 사람과 아이들에 대한 자연스런 이해로 스몄던 게 바탕이 된 듯했다. ...학부형이 아닌데도 삶은 닭을 들고 스스럼없이 찾아온 마을 사람과, 전교 네 명인 아이들이 교사와 함께 점심을 같이하는 모습은 두고두고 인상에 남는 것이었다. 참교육이라는 말이 가깝고도 단순하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던 것 같다.
(분교 중에서/ pp.106~107)

기차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신작로가 계획 단계에 머무를 때 뚫리기 시작한 철도는 그간의 생각들을 일순간에 뒤엎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했지만, 특히 전통 마을에서 내침을 받았던 가난한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여태 백안시 하여 폄하하던 이동과 이주가, 전혀 남부끄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온 나라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였다. 그래서 외딴집에서 외주물집이나 독가촌으로 옮겨오고 다시 살길을 찾아 먼 길을 나설 때, 가장 먼저 다가온 교통수단은 기차였다. ...기차를 탈 수 있는 역이나 간이역은 좀더 나은 삶을 기대하거나 헐벗은 이들로 항상 붐볐다. 그것은 앞서 말한 분교와 함께 조금이나마 희망을 엿볼 수 있는 이 나라 안에서 몇 안 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간이역은 외딴집과 독가촌에 살았던 아비 대의 소극적인 이동에서 벗어나려는 자녀들의 적극적인 돌파구로도 선택되었던 특수한 공간이었다.
(간이역 중에서/ p.135)

촌을 벗어나 도회로 이주하여 은퇴에 이른 노동자들이 그 무렵 처음 맡았던 차부의 기름 냄새를 실로 세련되고 고상한 냄새였다고 기억하는 일은 아무리 맘을 고쳐먹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 아득했던 것은 그 냄새를 맡으면서 도회로 나갈 꿈을 꾸었고 제 억눌린 처지를 펴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꿨다는 대목에 이르러서였다. 지금이야 생명을 헤치는 공해의 명사로 불리지만, 증언으로만 보면 신작로가 뚫리며 버스가 다니고 이어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공업화 시기까지는 그 냄새가 사뭇 다르게 여겨진 게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그것은 지금도 그리운 일상의 풍경으로 남아 있고, '내'가 어느 정도나마 가난을 이길 수 있었던 동기도 어찌 보면 차부가 내는 그 냄새에 있었다는 말로 그들은 방점을 찍어 주었다.
(차부집 중에서/ p.208)

재개발이 이뤄지고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막살이촌은 새로운 현대식 가옥으로 바뀌었다. 그곳에 살던 이들이 어디로 갔건, 일단 새집이 들어서고 길이 뚫린 것을 두고 잘살게 됐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모습은 사뭇 다른 듯했다. 외딴집에서 막살이집까지 이주해 오는 그 긴 거리와 세월 동안, 가난한 이 대부분이 마땅한 정처를 아직도 두지 못한 게 큰 이유였다. 낙담하여 기약 없이 길거리로 나선 이도 있었고, 속절없이 병에 걸리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까지 그 양상은 자못 슬프기까지 한 것이었다. 특히 요즘 들어서는 가족이 흩어지는 경우가 아주 많아 가난한 집에서 오는 아픔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막살이집 중에서/ p.279)

일단 순시지역에서 제외된 외딴집들은 오로지 '취약지구 방어계획'의 이름을 띠고 최소한의 자재 지원에 불과한 막살이 형태로 집촌화 되어 갔다. 한마디로 이런 집촌화는 행정명령으로 이뤄진 반강제 이주였는데, ...그 사정이 어떠하건 간에 행정과 대공치안의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때마다 철마다 전달되고 이행되어야 하는 여러 방침과 시책들이 집촌화의 영향 덕택에 집단으로 수용되고 이뤄지는 데 더없이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체제에 반하거나 당시 정부 입장에서 '불만', '불순'한 이를 가려내는 데도 집촌화 된 마을이 탁월하게 걸러냈음을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을마다 어김없이 들어섰던 분교와 그이들의 이동을 오해 없이 살필 수 있었던 간이역과 차부의 체계화된 짜임까지 보태지면서, 당시 정부는 효과적으로 민간 부문을 통제할 수 있었고 그것은 민주화 요구가 일어나는 시점까지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집촌들은 전통 지리학에서 말하는 집촌과 그 형성 자체가 다르다는 점에서 기형적인 것이었다.
(미관주택 중에서/ pp.297~300)

근대를 넘어 현대로 들어서는 길목에서도 우리에게 집은 무지개처럼 아득한 것이었다. 평생 걸어도 겨우 닿을까 말까 했고, '하꼬방'으로 불렸던 막살이집이나마 장만하면 그것은 성공한 인생으로 쳐주었던 게 저간의 현실이었다. 집은커녕 전세살이마저 거치지 못한 삶을 어쩌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스러져 간 가난했던 많은 이들을 볼수록 그렇다. 뼈대만 지어주고 입주를 시켰던 시민아파트도 마찬가지였다. 보상으로 나온 입주권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아파트에 들어가 살 형편이 마련된 이는 매우 드문 게 현실이었다.
(시민아파트 중에서/ p.323)

문화주택은 가난한 이의 이동과 이주사에서 하나의 방점을 찍는 종결 주택이라고 할 수 있다. 상류층의 양옥집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집장사들이 지은 문화주택은 한번쯤 희망을 걸어볼 만한 목표였다. 더구나 문화주택이 양식 가옥의 면모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서 그 시대 조류에 대체로 부응한다는 면에서도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 일원에 지어진 문화주택은 충분히 호평을 받을 만했다. 그 결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만여 채의 문화주택이 지어졌고 그 시범단지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서울 동대문구였다.
(문화주택 중에서/ p.365
)

 

 

 

_노익상

다큐멘터리 사진가와 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제 땅과 집을 떠나 살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지난했던 삶을 꾸준한 걸음으로 찾아가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차별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고등학교 생활국어 교과서에 5년간 글이 실리기도 했다. 2005 대한교과서와 2006 한국전력공사 캘린더 작가로 선정되었다. 이렇게 쌓인 결과물들은 지난 20년에 걸쳐 여러 월간지와 사외보에 글과 사진으로 함께 연재되었고,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전 2권) 등 다수의 공동 저작이 있다. 그런 가운데 그이들이 살았던 집, 가난한 이들의 살림집에 별도의 관심을 두고 일해왔다. 이 책은 바로 그 작업에 대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