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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 Evans _ My Foolish Heart

북카페청시 2010. 2. 3. 22:00

 

 

Bill Evans-My Foolish Heart

 

 

 

 

   Bill Evans Trio _ My foolish Heart

   

 

"원칙과 자유는 섬세하고 창조적으로 섞여야하며 정말로 훌륭한 결과를 낳아야 한다.
난 모든 음악이 낭만적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인 감상주의에 빠지면
낭만성은 방해받게 된다. 반면 원칙에 의해 운용되는 낭만성은 가장 아름다운 미적 상태이다.
이러한 조화가 이 특별한 트리오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난 생각한다."  

 

"난 많은 사람들처럼 내 자신이 재능 있다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장점이다.

왜냐하면 난 즉각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때문에 보다 분석해야하며, 그것이 나로 하여금

뭔가를 이루도록 채찍질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무한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즉각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문제를 해결하기엔

너무 인내력이 부족해서 그것을 결코 통과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를 이해했다면 그 다음 당신은

그 문제로 향하는 전체 여정을 즐길 수 있다고 난 생각한다."  

 

'빌 에반스 재즈의 초상'중에서
피터패팅거 지음 /황덕호 옮김/ 을유문화사

 

  

 

솔로 연주 시작하며 반짝이는 자질을 세상에 알려

 
자라온 환경과 교육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의 사랑도 인격형서이나 자기완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혼자서 스스로의 완성을 기하는 경우도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역시 더불어 산다는 것의 의미는 더욱 값진 것이리라. 이번 호에 소개하기 위해 빌에반스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니, 가족애가 이루는 사랑의 결실이 다시금 새삼스럽다. 단순히 아티스트를 칭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인간의 실체를 파악해 나와 비교하여 진실을 알 수 있다면 그것도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빌 에반스는 1929년 8월 16일 뉴 저지주 플레인필드에서 웨일즈 출신의 아버지와 러시아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슬라브식의 교회에 다녔는데, 여섯 살 때 피아노를 배우면서 바이올린도 함께 배웠다. 12세가 되어 플루트와 피콜로로 악기를 바꿨는데, 이 무렵 이미 피아노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어 절대적인 소질을 보이게 된다. 13세때 형 해리와 함께 연주하며, 하이 스쿨 시절에는 이들 형제의 밴드가 결성된다.

 

954년에는 양친과 음악 교사의 추천으로 뉴올리언즈에 있는 사우스이스턴 루이지에나 칼리지에 입학하여 아르바이트로 연주 생활을 하며 잼 세션에도 참가하는데, 이 무렵 기타리스트 멘델 로우와 만나 뉴욕행을 결심하게 된다. 칼리지를 졸업한 후인 1950년대 초에 허비 필즈의 셉텟에 참가하면서 프로듀서로의 본격적인 출발이 이루어진다. 데뷔인 셈이다. 필즈의 밴드에서 약 10개월 가량 활동하다가 현지 시카고에서 그대로 입대하게 되는데, 밀리터리 밴드에 있던 1951년부터 1953년의 시간은 연주 생활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제대 후에 잠시 부모와 함께 생활하다가 뉴욕으로 진출하여 스위트한 스타일의 제리 월드 밴드에서 활동하면서 1954년에는 이 밴드와 함께 첫 레코딩을 경험한다. 음악 이론을 공부하는 한편으로 1955년에는 가수 루실 리드와 딕 갈셔의 앨범에 참가하고, 1965년에는 조지 러셀과 토니 스카트의 레코딩에도 참가하며 스스로의 입지를 강화한다. 이때 솔로를 연주하여 반짝이는 자질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전대미문의 천재 베이시스트 스코트 라파로와의 조우

1956년 9월에는 최초의 리더 앨범「뉴 재즈 컨셉션」을 리버사이드 레코드사에서 출시한다. 냇 헬토프를 비롯, 일류 비평가들의 평가는 받았지만, 일반적인 팬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이 작품에는 ‘배드 파월’, ‘레니 트리스타노’, ‘호러스 실버’ 등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어 완전하게 자기 스타일을 확립한 연주라고는 할 수 없었다. 1957∼1958년에 걸쳐 조지 러셀, 찰스 밍구스, 지미 에퍼, 할 매쿠직 등의 레코딩에 참가하는데, 특히 러셀 오케스트라의 멤버로서 취입한「올 어바웃 로지」에서의 솔로는 높은 평판을 부르기에 이른다. 에반스의 존재가 폭넓게 알려진 것은 1958년 2월에 마일즈 데이비스 밴드에 참가한 이후로, 그를 멤버로서 참가시켰다기 보다 그룹 자체의 표현에 세련미를 심화시켰다고 보는 편이 낫겠다. 마일즈 데이비스 밑에서 약 9개월 정도 있었으나, 그룹을 떠난 에반스를 다시 불러들여 레코딩한「카인드 오브 블루」(Columbia)는 모드 주법으로 이루어 낸 걸작으로서 1960년대 재즈 신에 시사한 바가 정말로 엄청났다. 이 앨범은 혁명적이란 표현과 함께 마일즈톤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두 번째 작품인「에브리바디 딕스 빌 에반스」가 레코딩된 것은 1958년 2월인데, 첫 앨범과 비교할 때 한 단계 더 훌륭한 컨셉과 인상을 주었다. 특히 「피스 피스」는 그중에서도 무반주 솔로에 의한 연주지만 릴리시즘과 이미지네이션이 최고도로 발휘된 명연주이며, 이해「다운비트」지의 비평가 투표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일즈 그룹으로부터의 독립도, 자립에의 강한 의지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다. 1959년 가을, 독립 후에는 멤버의 이동도 심해졌지만, 스코트 라파로라는 전대미문의 천재 베이시스트를 만나게 된 것은 에반스의 성공 가도를 예견하는 동시에 가속을 더하는, 실로 빌에게는 쾌거였다. 또 델리커시한 리듬을 과시하는 드러머 폴 모티안을 영입함으로써 점차로 안정되어 갔는데, 이후로 재즈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최강의 트리오가 탄생한다. 이 트리오의 첫 작품이 불후의 명작「포트레이트 인 재즈」다.

 

앨범「Portrait in Jazz」와「Exploration」에서 삼위일체가 된 긴밀한 연주는 인터플레이의 극치를 표출하고 있고, 트리오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들은 1961년 6월에 ‘빌리지 뱅가드’에 출연하며 명성을 높여 가고 있었으나, 스콧 라파로가 불의의 교통 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자, 빌 에반스는 실의에 빠져 참담한 심정으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일년 후에 고인을 추도하는 형식의 음반「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와「Waltz for Debby」라는 명반이 발매되는데, 결국 이 넉 장의 앨범이 트리니티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게 된다.


경쾌함과 유머를 간직한 버브 시대의 음악적 색채

실의에 빠졌던 빌은 대안을 모색하던 중 1962년 초에 척 이스라엘을 베이시스트로 영입하여 활동을 재개한다.「How My Heart Sings」와「Moonbeams」를 녹음하면서 새롭게 의욕을 갖게 된 그는 7월에는 올스타 세션에 의한「Interplay」를 레코딩하고, 1963년 5월「At Shelly’s Manne-Hall」에서의 라이브 작품을 최후로 리버사이드에서 버브로 이적하게 되었다.

 

각 음반사에 남긴 그의 족적을 살펴보면 버브 시대에 남긴 음악적 특색은 전체적으로 밝고 경쾌함이 엿보인다. 첫번째 작품인「Empathy」에서는 유머러스한 표정을 싣고 있고, 헬렌 킨이 매니지먼트를 한「Conversations of Myself」로 1963년도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 시기에 드럼이 폴 모티안에서 래리 벙커로 교체되고, 1964년 여름에는 북유럽을 중심으로 한 투어링을, 1965년 봄에 재차 유럽 투어 콘서트를 하면서 유럽에서의 입지를 확보했다.

 

1966년 2월에는 ‘타운 홀’에서 콘서트를 개최하여 건재를 과시했으며, 1967년에 실시한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서는 에디 고메스(B), 잭 디조넷(Ds)으로 구성하여 출연했는데, 이 두 개의 실황 음반은 녹음과 내용 면에서 걸출하여 지금까지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버브의 버라이어티한 기획력이 돋보였고, 그 결과「Alone」이라는 솔로 앨범도 이런 맥락을 충분히 배려한 것이었다.


버브 시대의 막 내리고 다양한 연주 활동 펼쳐

약 10년에 이르는 버브 시대를 종료하고 컬럼비아로 이적하여 1971년 5월에 첫 레코딩한「The Bill Evans Album」에서는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1972년에는 조지 러셀 오케스트라와 협연한「Living Time」으로 컬럼비아 시대를 마감한다. 다시 판타지로 이적하여 새로운 컨셉과 기획의 다양화를 꾀하면서도 심플한 맛을 내세운 점이 특색이다. 제1작「Intuition」은 에디 고메스와 듀오로 레코딩했다. 그 외에「The Tony Bennett & Bill Evans」와 솔로인「Alone Again」,「Quintet Sense」에서는 올스타의 연주로 레코딩하였고, 트리오로 된「I Will Say Goodbye」도 추천하고 싶은 수작이다. 워너 브라더스로 이적 후 1977년 8월에「You Must Believe in Spring」을 첫 작품으로, 1978년에「New Conversations」와「Affinity」를 발매하고, 1979년에는「We Will Meet Again」을 레코딩하였으며, 1979년부터는 마크 존슨(B), 조 라바바라(Ds)로 구성한 트리오로 활약하였다. 그 해 가을부터 연말까지 캐나다, 프랑스, 서독, 네덜란드, 스페인을 투어링하였는데, 사후에 엘렉트라 뮤지션 레이블에서 출반한「Paris Concert」와「Paris ConcertⅡ」에서 그때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음악의 향기를 남기고 간 재즈계의 쇼팽, 빌 에반스

1980년 9월에 일본 순회 공연이 예정되어 있던 빌은 8월 말경에 샌프란시스코의 ‘키스톤 코너’에 출연하여 연주는 하였으나 이미 신체의 이상이 발견되어, 9월 9일 뉴욕의 ‘팻츠 튜즈데이’에 출연 도중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다. 5일 후인 9월 15일에 타계했는데, 사인은 간경변, 기관지 폐렴과 출혈성 궤양이었다. 재즈계의 쇼팽 빌 에반스, 그는 불귀의 몸이 되었으나 그가 남긴 앨범이나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피아니스트들은 오늘날도 빌의 컨셉과 스타일을 좇아 환생하고 있다. 사람만 간 것이지 그의 음악이 간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절제된 피아니즘에 유머가 넘쳤고, 심플한 연주에도 결코 스윙감을 잃지 않은 스타일리스트였다. 아직도 그와 연주했던 많은 뮤지션들이 그의 음악 세계와 연주 철학을 높이 칭송하고 인간성을 술회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인터플레이의 극치인 기타리스트 짐 홀과의 듀오 앨범인「Undercurrent」 가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 발매되었는데, 지금은 블루 노트 레이블로 만날 수 있다. 진정한 명반으로 필청을 권유하고 또 원하는 바다. 빌의 유산으로서….

 

 - 이렇게까지 가슴속에 파고들면 뭐라 할말이 없다.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게 아닐까?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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